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 해 해전 (문단 편집) == 평가 == 이 전투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미군이나 미국의 전사가들 사이에서 '일본 해군을 사실상 와해시킨 결정적인 전투' 또는 '일본 해군의 등뼈를 부러트린 전투'로 평가받는다. 겉모습만 보자면 [[독수리의 날]]처럼 단일 전투에서 압도적인 교환비를 올린 것으로 유명해진 몇몇 항공전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일방적인 전투가 될 소지가 다분했던 여타 항공전 사례들과 달리, 양쪽 모두 제대로 된 부대 편제를 유지한 상태로 각자의 주력끼리 정면으로 부딪히고서도 일방적인 교환비가 발생하고, 이 단일 항공전 하나로 양자간의 전략적인 추가 확 기울어지기까지 한 예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된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미군은 앞서 나온 바와 같이 일본군에 대해 질적[* 일단 항공기면에서도 미군은 [[F4F 와일드캣|F4F]]보다 스펙을 업시킨 [[F6F 헬캣|F6F]]은 [[A6M|제로센]]보다 기동력과 선회력이 좋았고 더욱이 방어력도 뛰어났다. 레이더면에서도 미국은 레이더를 더 발전시켜 일본 함재기 접근을 사전에 파악해 매복까지 할 수준에 도달했지만 일본군은 적에게 역탐지 된다며 레이더 연구 및 사용마저 금지시켰다.]은 물론 양적 우위[* 미국도 1942년에는 병력과 물자 부족에 허덕였지만 1943년 들어서는 자원입대한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되었고 1943년을 기점으로 그야말로 쇼 미더 머니급으로 군수품과 선박들이 폭발적으로 공급되었다. 반면 일본군은 공업화가 미국에 비해 딸렸고 인구면도 자원면에도 도저히 미국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를 모두 갖고 있었다. 이는 본 해전을 설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들어가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일단, 미 함대는 일본 함대를 정보력으로도 압도하였다. 실질적으로 교전을 실시한 기동부대간의 색적만 보면 일본이 유리하게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 기동부대는 미 항모전단이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먼저 발견했고, 상대의 닿지 않는 거리에서 먼저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괌의 비행장으로부터 지상 주둔 항공병력의 지원을 받음과 동시에 함재기들이 이 비행장을 활용하여 보다 융통성있는 작전도 가능했다(마지막 부분은 실패였지만). 하지만, 단순히 일선 부대들 간의 색적을 떠나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해 대처하는 부분에선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전투 개시 전에만 해도 일본 해군 수뇌부들은 미군의 공격시기와 공격지점을 헛짚고 있었다가 미 함대가 예상보다 일찍 마리아나 제도로 몰려오자 부랴부랴 전력을 수습하여 전투에 돌입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시기와 지점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준비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부터 이미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반면, 미군의 경우 일찌감치 암호가 숭숭 뚫린데다, 결정적으로 3개월전 일어난 해군 을 사건, [[연합함대]]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와 주요 참모들이 탑승한 수송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것도 모자라 그 수송기에 있던 일본 해군의 新 Z작전 계획을 통째로 입수해 '''일본군의 작전계획 전부를 얻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해군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디서 자신들과 맞붙으려는지 짐작하고 있었으며 덕분에 미 해군은 일본 해군 함대를 정박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었다. 스프루언스가 자신들의 원래 목적인 마리아나 제도 점령에 집중하면서 일본함대에 대해서는 요격전에만 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괌을 비롯한 지상 비행장들을 본 전투 발발 이전에 일찌감치 박살내 놓고, 전투 와중에도 수시로 두들겼던 것도 위에서 언급된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본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가 일부러 정찰 범위를 축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순간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본함대를 치러 가자고 들고 일어나는 걸 미연에 막고 자신의 의도대로 전황을 끌고가려던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참고만 해야 한다.] 그럼에도 연합함대는 자기들의 작전이 미군에 전부 털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작전에 나갔다가 기다리고 있던 미 해군의 공격에 칠면조 사냥을 당하고 말았다. 위 문단의 마지막에서 또 다른 승패의 이유가 나온다. 바로 목적의식이다. 시간을 거슬러 [[미드웨이 해전]]을 살펴보면 당시 공격자의 입장이었던 일본군은 미드웨이 제도의 점령과 미해군 항모부대의 괴멸이라는 두 가지 목적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은 채 전투에 돌입했다가, 일본 항모부대 섬멸이라는 하나만 노리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미군의 반격에 휘말려서 그 어떤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 반면, 본 해전에서 공격자 입장이 된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우선 순위로 두고[* 스프루언스 제독이 니미츠 제독에서 받은 명령은 '사이판, 티니안, 괌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아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일본 함대를 격멸하라는 명령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 따르는 부가적인 것들을 후순위로 돌림으로서 일본군 오자와 제독이 파놓은 함정에 걸리지 않고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일본군의 방해를 물리쳤고, 끝내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이뤄냈다. 따라서, 단순히 미 해군, 일본 해군의 장교단의 기량이나 기술 수준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는 없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자신이 목적한 바와 해야 할 일을 인식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대응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머지않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 해군은 이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투]] 이후와는 다르게 '''항모기동부대를 재건하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항공기 손실은 어떤 식으로든 보충할 수 있었지만, [[다이호(항공모함)|다이호]], 쇼카쿠급과 같이 손실된 정규 항모의 보충은 당시 일본의 조선 능력과 보유 자원상 이미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일본의 조선소들은 본 해전 이전부터 남태평양에서의 소모전에서 피해를 입은 순양함급, 구축함급 함정들의 수리에만도 벅차하던 상황이어서 신규 함정의 건조는 그만큼 더뎌졌으며 전선을 유지할 병력이 모자라자 기술자나 대학생 같은 고급 인력들도 무차별적으로 징집하던 시기였다.] 결정적으로, 항공기를 운용할 '''인력은 더이상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함재기 조종사 및 승무원들은 대체로 전쟁 초기 중일전쟁과 영국과의 해전을 통해 경험을 풍부히 쌓았던 1항전과 2항전, 5항전에 소속되어 참전한 인원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기량이 악화되어 있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나마 그 당시에 일본에 남아있던 항공모함에서의 항공기 운용 경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이 필리핀 해 전투 단 한 번의 전투에 싹 쓸려나갔다. 게다가 제1기동함대 창설과정에서 그나마 그때까지 남아있던 항모 탑승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을 긁어모아서 중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으로 배치했는데, 이들 베테랑들의 손실도 매우 극심했다. 총 35명의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들 중 22명이 전사했고 몇몇은 목숨을 어찌 건졌으나 전선에 복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비록 아직 일본 해군의 수중에는 [[즈이카쿠]]를 비롯한 다수의 항모가 있었지만, 항공기도 그걸 운용할 사람도 없는 항모는 그저 '''덩치 큰 수송선'''에 불과했다. 이로서, 일본 해군 전력의 중핵이었던 항모기동부대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이는 일본 해군의 활동 범위가 일본군 점령지 내 지상 비행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됨을 의미했고, 그런 탓에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미 해군과 직접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껏해야 방어선 돌파만을 노리는 수준으로 비참하게 추락했으며, 그마저도 전 해군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미군 입장에서는 대일본전의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일본의 연합함대 해군이 겨우 재건한 항모전대 주력을 격퇴함으로서 제공권과 제해권을 종전까지 영구 장악했기에 이 해전 이후에 펼친 작전을 매우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일본 해군이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에 앞으로 미 해군은 행동의 제약을 크게 덜었지만, 미 해군이 이걸 깨달은 것은 [[레이테 만 해전]]부터였다. 미 해군이 진작에 일본 해군의 사정을 알았다면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삽질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지상기지의 항공기들과 항공모함이 주축이 된 기동부대는 [[절대방위선]]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방어전략의 필수적인 요소였는데 필리핀 해 해전을 거치면서 죄다 날아가 버렸다. 이로 인해 절대방위선의 주요 거점인 마리아나 제도 상실이 거의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판 전투|현실이]] [[제2차 괌 전투|되었다]]. '''항모부대의 괴멸과 마리아나 제도의 상실로 인해 일본군 상층부가 정했던 [[절대방위선]]은 박살나 버렸다.''' 미군의 손에 떨어진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요긴한 전진기지이자 일본 본토를 신형 전략폭격기 [[B-29]]의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는 항공기지로 안성맞춤이었고, 미군은 이를 십분 활용하게 된다. 본 해전 이후 전황이 급속도로 기울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주력이 박살나고 주요 거점을 미국에게 뺏긴 일본은 어떻게든 그냥 버티는 것 말고는 대규모 반격작전 같은 정상적인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연함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은 아래와 같이 훈시했는데 ||'''"이 한 번의 전투에 제국의 흥폐가 달렸다."'''[*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라는 훈시를 한 이래 태평양 전쟁에서도 주요 격전때 마다 이와 비슷한 훈시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일본제국의 흥폐(興廃)[*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가 결정되어버렸다. '''이 전투의 [[사이판 전투|여]][[제2차 괌 전투|파]]로 인해, [[일본 본토 공습|일본 본토가 본격적으로 공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